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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세 김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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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세 김극일

 

bg_01.png 53세 김극일(金克)一자 용협(用協), 호 모암(慕庵), 시호 절효(節孝)

 

시조 김수로왕의 52세손인 부 김서(金㥠)와 모 숙부인(淑夫)人 밀양박씨(密陽朴氏)의 자로서한성부윤 이간의 딸 부인 슬하에 6남을 두었으며, 손 일손(馹孫), 증손 대유(大有)와 함께 4대에 걸쳐 나타난 3현인(賢人)으로 칭송되고 있으며, 판도판서공파를 삼현파라 칭하게 되었음.

 

- 어릴 때부터 조부모와 부모를 지성으로 봉양했고, 장성한 뒤에는 장인의 간곡한 사관 요청 이 있었으나, 양친의 봉양을 이유로 거절하고 성심을 다하여 봉양하는 등 효행으로 명 성을 떨쳤다. 또한 후손의 훈회에 정성을 기울인 결과 아들 맹(孟)은 물론 손자 준손(駿孫). 기손(驥孫). 일손(馹孫)이 모두 문과에 급제할 수 있는 학식과 절행으로 명성을 떨치는 토대를 이루게 되었다.

- 세종 때 청도군수 이기의 보고에 따라 효자정려(孝子旌閭)가 건립되었고, 성종 13년(1482년) 김종직(金宗直)이 찬한 효자문비가 다시 건립되었다. 청도의 자계서원(紫溪書院)에 제향 되었다. -단종 2년 8월 17일(병신) 의정부에서 예조(禮曹)의 정문(呈文)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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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청도군의 장사랑(將仕郞) 김극일은 그 어미가 일찍이 등창이 나자 몸소 입으로 빨았으며, 어미가 죽으니 흙을 져다 무덤을 만들고 무덤 곁에서 살면서 날마다 조석전(朝夕奠)을 올린 뒤에 아비에게 정성(定省)을 하였고, 아비가 또 이질(血痢)에 걸리자 그 곱똥의 달고 씀(嘗其甛苦)을 맛보아 가면서 간호하였으며, 아비가 죽으니 또 여묘(廬墓)살이를 3년 동안 하였는데, 특별한 음식(異味)을 얻을 것 같으면 천신(薦新)하지않고는 먹지를 아니하였으며, 영역(塋域) 밖의 숲속에 호랑이 새끼가 있으므로 제사(祭祀) 지내고 남은 음식을 주어 가축(家畜)을 기르듯이 하였고, 아비에게 있었던 두 첩(妾)을 친어미같이 보살피며, 의복(衣服)과 음식을 떨어지지 않게 하여, 첩이 감동하고 30여 년 동안 수절(守節)하며 살다가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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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조선왕조실록 원전 6집 70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