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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세 김관(중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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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세 김관(중시조)

 

bg_01.png 49세(삼현파 파조)김관(金管) (자 희범(希範), 호 정성헌(靖醒軒), 시호 문정(文貞))

 

시조 김수로왕의 47세손인 김상주(金相宙)의 2남중(장남 김방직(金邦直), 차남 김용직(金龍直) 차남인 48세손 부 김용직(金龍直)의 아들로서, 아들 김문숙/(金文淑)을 두었음.

 

- 삼현파는 1세 김관-2세 김문숙-3세 김항-4세 김서-5세 김극일로 후손이 이어짐.

- 안향(安珦)과 친교를 맺고 학문을 논하며 남다른 교분을 이어갔으며, 1269년(원종 10년)

삼별초의 난때 안향이 강화의 적중에 억류되니, 안향이 역적의 무리에게 순종치 말고 왕도의 의를 지키라고 격려하면서 온갖 지혜를 다해 안향을 구출하였다. 또한 임연(林衍), 임유무(林惟茂) 부자가 원나라와의 강화를 반대하고 원종을 폐하려 하자 송송례(宋松禮), 홍문사(洪文斯) 등과 더불어 임유무 일당을 제거하고 원종을 보호하였다.

- 1289년(충열왕 15년) 충선왕을 호종하여 원에 가서 연경에 머무는 동안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안향과 함께 수록하여 왔으니 이것이 주자학이 들어온 시초가 된다.

- 1301년(충열왕 27년) 도성에 불이 나서 궁전이 온통 불바다가 되었을 때 화염 속에 갖친 왕을 구출하였다.

- 1343년(충혜왕 복위 4년) 원이 고려 충혜왕을 붙잡아가서 계양(광동성)에 유배를 배종하였다. 이듬해 중국의 악양에서 충혜왕이 죽자 원의 조정에 나아가 자신을 인질로 하고 충혜왕의 시신을 고려로 보내어 장사지내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원의 조정에서는 공의 충성에 감동하여 충혜왕의 시신과 함께 환국을 허락하였다.

- 고려 충열왕 때 판도판서(版圖判書)(현재 재무부 장관), 국자사(國子師)에 이르렀고, 김해김씨 판도판서공파 일명 삼현파(三賢派)의 파조가 되었음.

- 1250년(고려 고종 37년) 5월 5일 탄생

- 1348년(충목왕 4년) 2월 19일 향년 98세에 졸 하였으며, 묘는 김해 저소산(楮沼山)(지금 창원군 대산면 유등리) 신좌(辛坐)임.

- 고려 충선왕 때 왕에게 간(諫)하여 부도(浮屠) (불교)를 배척하고 학교를 건설하여 유학을 진흥시키는 등 국가에 많은 공을 세웠다.

 

중조 관(管)공 행장 판도판서 문정공 정성헌 선생 신도비명

 

 

선생은 김해김씨 휘(본명)는 관(수레 굴통쇠관 金+官)이니 원종(고려) 임금이 사랑해 관(管)으로 고쳤다. 자는 희범이요 호는 정성이요 시호는 문정이다. 가락 태조왕 휘 수로왕과 신라 태대각간 흥무대왕 유신의 후손이다. 경술 5월 5일 무인에 선생이 탄생하니 때에 그 마을에 오색 문채에 무지개가 종일 공중에 뻗쳤더니 장성할수록 기품이 괴걸해서 8세에 입학함에 한번 본 것은 문득 외우고 행지가 단정해서 완연히 어른같더라.

 

병인에 현량과 3장에 오르니 시관 참지정사 김경손 동지중추 유경이 특선 을과 진사 명경 급제에 뽑아 크게 칭찬하고 조정에 사람 얻음을 하례 하더라. 처음 교서랑에서 한림원으로 옮겼더니 때에 안유가 먼저 이 소임을 맡았다가 선생의 단아함을 보고 즐겨 교유하니 공이 여가에 경전을 토론하고 의리를 강마해서 고금치란(혼란에 빠진 세상을 다스림)이 손에 쥔 듯 밝으니 안유가 국가에 큰 재목이라 해서 더욱 공경하기를 중하게 했다.

 

의관을 정제하고 조정에 서서 바르게 간하면 여간한 사람이 감히 여기는 말이 없더라. 왕명을 받들어 분성을 쌓을 새 제도를 조금도 잃지 않았고 옥을 다듬고 꽃을 가꾸어 2릉을 장식하니 구경꾼이 구름 같았다. 희종 기사년에 적신 임현 부자가 왕을 폐하는 변이 있거늘 선생이 홍문과 함께 잡아 베었고, 삼별초의 난에 안한림 유가 적진의 꾀임에 빠졌거늘 선생이 강혁 조항의 일을 들어 대의(大義)를 굳게 지킴을 밝혔더니안한림이 크게 깨달아 순역의 의리로 달래어 돌아오니 왕이 칭상(稱賞)하거늘 유가 굳이 사양하되 신의 절개를 보존함은 곧 김한림의 힘이니 어찌 홀로 상을 받으리요 하였다. 이에 왕이 선생을 불러 중상(重賞)하고 태상에 명해서 김관(金管)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정축에 판도사 좌랑에 배했다가 감찰어사로 옮기고 국자사업에 올라 안유와 함께 이 직책을 맡아 국법을 바로 잡음에 세력에 의존하던 자들이 감히 기를 펴지 못하니 왕이 더욱 선생을 중히 여겨 병풍 두 자리를 내리고 경은 나의 팔다리다. 팔다리가 불안하면 어찌할꼬. 왕이 병풍이 되어 간사를막을 것이니 경은 충성을 다해 나를 도우라. 이후 동리 이름을 어병(御屛)이라 일컬었다.

 

힘써 이단을 물리치고 정학을 바로잡아 책임을 다했던 하루는 왕이 묻기를 세상이 다 부처를 성인으로 알거늘 경이 홀로 믿지 않음은 무슨 까닭인고. 대답하되 온 세상이 어지러워도 나 홀로 편안하고 온 세상이 다 취하여도 나 홀로 깨어 있다 하니 왕이 옷깃을 여미고 정성(靖醒) 두자를 호로 내렸다.

 

기축 10월에 충선왕이 원에 들어갈 새 선생이 안제거와 함께 수행해서 연경에 머물며 주자전서를 보고 손수 그 글을 베꼈다. 경인년 봄에 왕을 따라 돌아오니 밀직사자를 배했다. 충선왕 무술에 왕을 따라 원에 들어갔다. 신축년 5월에 큰불이 나 궁전으로 뻗치니 선생이 왕을 화염 중에 구했다.

 

국학이 미비함으로 안중찬과 함께 상의해 궁전 출납과 노예의 제도 사역의 법칙 등을 정해서 백관들이 이를 익혀 스스로 출자해서 자금을 넉넉히 하고 전각을 지어 성인의 영정을 뫼셨다. 왕이 영정에 절할 시는 제생으로 풍류와 관복을 갖추게 하니 특히 판밀직사자 도첨의 문하시중을 배했다. 하루는 안중찬의 병을 위문할 때 안중찬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이르되 내가 공으로 더불어 4조를 섬겨 진퇴를 같이 했거늘 이제 이단이 쉬지 않고 성도가 서지 못한 중 죽게 되었거니와 공은 국가의 동량이라 부디 힘쓸지어다. 죽음에 우정의복을 입었다.

 

경오년에 충선왕의 관을 뫼셔 돌아와 제일 행사가 여의치 못해 병을 핑계로 돌아갔다. 기묘년에 충숙왕이 별세하고 충혜가 다시 올랐더니 원이 왕을 계양현에 유배하거늘 홀로 부축해 악양에 이르러 왕이 별세하니 선생이 대신 유치(원에 대신 남기를)하기를 청하니 원이 그 충성에 감복하여 놓아 주어 왕의 상여를 모시고 돌아오니 직제학 이인복이 교외에 먼저 이르러 이르되 금일 운구하여 옴은 선생의 충의라 이보다 더 다행함이 없도다 충목왕 을유년에 국자사업 판도판서를 배하고 궤장(几杖: 팔을 받치는 침구와 지팡이) 약물 의류 등을 내렸으나연로에 과애함으로 병이 되어 2월 9일 무자에 향년 98세로 세상을 하직하니 왕이 듣고 슬퍼해서 이인복을 보내 벼슬과 시호를 내리고 김해군 대산면 저소산 신좌에 장지를 내리니 국재 권부 익재 이제현이 7관 12도에 풍악을 갖춰 장사했다.

 

배위는 나주군부인 임씨니 대사성 의충의 따님으로 선생보다 먼저 갑인년 10월 2일에 돌아가시니 묘는 합장이다.

아들 문숙은 경덕재생이오 손자 항/伉은 도제고 판관이오 증손 서/湑는 현감이오 현손 극일/克一 은 사시절효요 5대손 건(健)은 군수요 맹(孟)은 증이조참판이며 용(勇)은 한림이요 순(順)은 진사요 인(靭)은 녹사요 현(鉉)은 진의요 6대손 태석(泰碩)은 진사요 준손은 직제학이요 기손은 이조좌랑이요 일손은 호 탁영이니 증이조판서에 시호는 문민이요 7대손 인손은 충순위요 대유(大有)는 호 삼족당에 증응교이니 그 후손의 수효 한이 없이 동국에 퍼졌으니 이루 기록치 못한다. 아름답도다.

 

선생은 하늘이 낳은 자품으로 정대 강명해서 집에서는 효성을 다하고 나라에 충성해서 예우함이 극진하고 처사를 안상(성질이 찬찬하고 자세함)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 훈덕과 덕망이 당시에 빛났으니 후세에 유명한 사람 중에 덕행을 몸에 갖추고 경사가 후손에 이르는 이는 선생이 단연 우위를 차지할 것이다.

 

그 사손 진곤(璡坤)이 그 족인 연과 용우 용완으로 묘문을 청하거늘 내 비록 글에 어두우나 그 이름 실림을 기쁘해 이 같이 쓰고 이어 새기노니 오직 선생은 드문 철인일세. 타고난 기운에 신령한 자질이다. 세운 큰 뜻은 충효와 근본이오 일찍이 벼슬해 그 기품 드러냈네. 7관으로 학교 세워 한마음 북돋았네. 싸움터에 용맹은 어버이를 부축했고 사람 위한 심정 회헌(안 )이 살아났네. 가짜 왕을 베어 역당을 소멸했고 도성에 큰불은 사정 없어라. 몸소 구원하니 곧 정성이요 악양에 운구함은 원나라도 감복했네. 이 큰 공적을 지금도 우러보니 높다란 무덤은 금릉 옛터라. 자손이 힘을 모아 이 비를 세우니 그 공덕 무성하다. 천추에 빛이 나네. 비록 후학의 이름이 외람하나 원하니 후손들은 이 글을 볼지어다.